Monday, May 24, 2004

초연艸姸의 유서

아아, 송골매나 해동청海東靑 보라매 암수가 만나 새끼를 낳으면 그 뒤로 자웅雌雄의 역할이 분명해진다 하오니 우리 인간과도 닮은 바가 크옵니다. 수컷은 밖에 나가 사냥을 하고 암컷은 둥지에 남아 새끼들을 양육하는 일이 기특하고도 아름답다 들었사옵니다. 다만, 수컷이 없어지면 암컷 혼자서 사냥을 하는 한편 새끼들을 돌보느라고 자식을 적지 않게 잃는다 하옵고, 그 맹금의 가정에 암컷이 없어지면 수컷이 사냥을 해 오기는 하되 둥지에 먹이를 통째로 내려놓을지언정 잘게 찢어 주지는 못하는지라 또한 새끼들이 끝내는 모두 굶어 죽는다 하옵니다. 하온데 머리가 먹물처럼 검은 인간의 가정사가 어찌 이보다 못할 리 있으오리까?

소녀의 몸에 아이가 깃들어 점차 달이 차오르듯 자라나는 모양을 지켜볼 때마다 소녀가 송골매의 일을 머리에 떠올리니, 우선은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요 기쁨이었나이다. 소녀가 스승님의 아이를 몸으로 받아서 다시 스승님의 팔에 안겨 드릴 수 있다면 이보다 큰 광영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더구나 상기도 열 몇 살 어린 소녀의 마음으로 자나 깨나 스승님을 우러러 모시었으니 참으로 불러 오는 배가 소녀의 꿈이었으며 소녀의 자랑이었사옵니다.

하오나 어찌 소녀의 욕심을 앞세울 수 있으오리까?

스승님께옵서는 소녀 하나의 스승이 아니옵고 더구나 소녀 하나의 지아비가 될 수 없다는 큰 깨달음을 얻었나이다. 예로부터 돈이 많은 부자 어른이라면 먼저 마을에 큰길을 내고 또한 마을에 샘을 파서 모두가 마시게 한즉, 하물며 스승님께서야 이 나라 목마른 백성들이 모두 마실 수 있는 지혜의 물줄기를 대셔야 하옵고 갈 곳을 몰라 허둥대는 만백성과 우마차가 동시에 지날 수 있는 한길을 뚫으셔야 할 어른이 아니시리까?

하여 스승님의 허락이 없이 소녀는 아이가 제 몸에 깃들 때마다 아무도 모르게 생아편을 먹였으니 아이도 먹고 소녀도 또한 섭취했던가 보옵니다. 수 차례 제 뱃속에 들어섰던 아이는 그때마다 스승님의 대의를 위해 참으로 갸륵하게도 스스로 눈을 감았사오나 천벌은 소녀에게 남았사오니, 그게 미처 생각지 못했던 아편 중독이었나이다.

아아, 크고 높으신 스승님이시여.

소녀는 이제 돌아가나이다. 가면서 주제넘게 여쭈옵나니, 어찌 아이의 일만이 소녀의 죽음을 재촉하였겠나이까? 나라가 부서지매 어찌 선비만이 아파할 일이며 남녀가 따로 있어야 하나이까? 고매하신 선비들의 절명을 소녀가 잇나이다. 하지만 소녀가 아무리 우긴다 한들 어느 누가 나서서 의로운 죽음이라 칭송하리이까? 다만 차제에 스승님께서는 소녀의 일이 조금이라도 애통하시거든 나라와 더불어 이 소녀도 산화했노라고 기억해 주소서. 중독만이 문제라면 끊지 못하였겠나이까?

스승님께는 감히 용서를 빌지 못하오나 저 하늘에 가 닿거든 채 피지 못한 채로 세상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던 제 아이들에게는 손발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용서를 구할까 하오니 널리 헤아려 주시옵소서.

다만, 이승에서 소녀가 받았던 분에 넘치는 사랑과 행복을 기억하여 엎드려 청하옵니다. 부디 이 나라 강토에 맑은 샘과 한길을 내시는 일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소녀의 죽음이 스승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애써 소녀를 찾지 않으시기를 바라나이다.

엎드려 사배四拜를 올리나니, 앞의 간청이 그 둘이고 세 번째는 단군성조께 올리는 무한한 숭배이오며 마지막 큰 절은 스승님께서 품어 주신 헤아릴 수 없는 크나큰 사랑을 안고 떠나는 이 소녀의 변함없는, 오히려 날로 새록새록 솟아나는 연정戀情이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pp153-155, 神市의꿈 3, 이병천, 한문화,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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